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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그리고 '설총' 만나다

'살며 생각하며'

송면규 | 기사입력 2019/01/23 [07:30]

'원효' 그리고 '설총' 만나다

'살며 생각하며'

송면규 | 입력 : 2019/01/23 [07:30]

요즘 많은 사람들이 '총체적 난국'이라고 합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용어는 단지 연설할때만 사용되는 것으로 인식된지 오래입니다. 해서,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건 정치인들 언어에 사람들은 관심없어 합니다. 오늘은 일상을 벗어나 '신라'를 방문해서 '원효''설총' 두 분을  잠시 만나볼까 합니다.

 

스님인 아버지를 두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종교인 불교와 전혀 다른 유학을 택한 건 왜 일까? 많이 궁금합니다. 그것도 불교가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던 시대에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효'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불법의 '오의'를 깨달음에 있어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경학을 비롯해서 유학에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서 '해골 물의 깨달음'을 얻고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한편 '설총'은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를 부모를 두고 있으며, 아버지인 원효가 입적하자 아버지의 뼈를 빻아서 진흙에 섞어 원효 대사의 모습을 본따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고, 설총이 분향을 마치고 나가자 그 소상이 고개를 돌려 설총을 바라보았는데, 그 후 쭉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일화를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설총은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한림을 지냈으며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았고, '국학'과 '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입니다. 특히 중국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는 표기 방법인 소위 '이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설총은 아버지인 원효 대사 뒤를 이어 불교에 귀의하지 않고 유학을 택했을까? 궁금해 집니다. 요석 공주인 어머니가 처음에는 승려가 화랑에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기에 아버지 뒤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승려들의 역할이 점차 축소될 것을 예측해서 아들에게 유학에 정진하도록 유도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해봅니다. 아버지인 원효가 가족과의 인연을 끊는 출가의 길을 걷는 바람에 어머니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 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깨달음이 설총을 유학자의 길로 이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아버지인 원효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소요산에 들어와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원효가 정진하는 곳을 향해 석달 동안 매일 기도를 드렸으나, "나는 소요산의 신선이 되어 세속으로 향하는 발이 없어져 내려가지 못한다"는 시종의 편지를 받고 코 앞에 있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천리길을 되돌아 가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보면서 '이것이 출가자의 길인가' 회의했기 때문으로 해석해 봅니다.

 

설총은 신라의 고승으로 알려졌던 아버지의 삶에 경도되어 자신도 참선수행의 길을 걸을까? 생각했으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까지 거부하는 불교에 회의를 느껴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전래되어 오던 불교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마음을 바꾸어 현실적 실용학문인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도자'는 왜? 가족과 인연을 끊고, 또 속세를 등지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겠다고 하는 걸까? 많이 궁금해집니다. '머릿속으로 알고 모르고의 경지를 벗어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 '깨달음의 도'와 큰 간극이 있어서인지 필자에게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두 분 선각자께 묻고 싶습니다.

<살며 생락하며> 글을 쓰고, 전공서적을 집필하면서 색소폰 연주를 취미 생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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